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과연 공평한가? - 팀 켈러

히즈웨드 |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말하는 지옥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주는 강의입니다. 비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조차 갖을 수 있는 지옥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었으면 합니다.


    - 목차 -

    0.눅16:19~31과 서론

    1.지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2.지옥의 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세상에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3.지옥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4.결론



    (영상 출처는 유투브의 On the road to Damascus 채널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6:19~31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서론


    매주 우리는 뉴욕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가장 불편히 여기도록 만드는 주제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불편해하는 주제들을 말이죠. 이번 주에 살펴 볼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인간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판사라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여러가지 형태와 고려 사항들이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가장 이해할만한 반박은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은 말하죠.


    “지옥의 심판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란 개념과 양립하는가?”


    “지옥의 심판이 존재하는데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사람들에게 대답했던 내용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목사다보니 저에게 종종 물어보십니다. “지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대답하는 내용 중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아마도 성경이 묘사하는 불 지옥의 이미지는 비유일 것입니다.”


    “휴우... (다행이다)”


    그러면 제가 대답하죠. “아마도 화염보다 무한 배로 더 끔찍한 무언가에 대한 비유겠죠.”


    “헉..?”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옥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은 화염보다도 훨씬 끔찍합니다. 성경이 지옥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이해하는 일은 사실 필수적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세상에서 평화롭게 사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에 있어서 말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가 (지옥과 연결시켰을 때) 매우 반직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각각을 살펴보면 더 반직관적이죠. 한번 살펴봅시다.


    첫번째 토픽이 가장 길 것입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그 위에 살포시 얹을 뿐입니다. 





    첫째, 지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부자와 거지죠. 오랫동안 주석가들이 우리에게 말해 온 바에 따르면, 이 비유에는 놀라운 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 비유에만 등장인물의 정식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다른 모든 비유에선 등장인물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거지로 등장하는 ’나사로’만 제외하고 말이죠. 


    한 등장인물에게 이름이 있으니 당연히 다른 인물에게도 이름을 붙여 주셨을 것 같지만,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이 있는 한 등장인물과 이름이 없는 다른 등장인물. 이 대조는 의도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당시 이스라엘의 배경에서 무신론자 혹은 타종교인이 부자인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 부자는 당연히 성경의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에게 기도하고, 또한 성경의 율법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지옥에 있습니다. 이름도 없이 말입니다. 왜죠?


    25절을 봅시다. “생각해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다.” 이미 얻었다는거죠. 네 인생 중에 가장 좋은 선을 이미 누렸다는겁니다. 



    철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Summum bonum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인생 최대의 선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최고 선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궁극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이며, 여러분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던지 간에, 스스로가 최고의 선이자 궁극적인 가치로 여기는 그것이 여러분에게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이 남자는 이미 그것을 얻었다는겁니다. 과거형입니다. 


    지위와 부가 정체성의 기초였습니다. 이제 그 지위와 부가 사라지자, 이 사람 자체가 남질 않게 된겁니다. 그는 부자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더 이상 정체성이 없어요. 사라진거죠. 이름이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빼앗길 때, 부나 지위 등을요. 그는 정체성을 빼앗긴거니까요. 



    이렇게 물으실겁니다. 대안이 뭐죠? 만약 지옥에 가는게 모든 것을 빼앗기는거라면, 누군가가 모든 것을 빼앗을 때조차 정체성을 유지할 대안이 뭐죠? 덴마크의 위대한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책들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이해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책은 확실히 이해했죠. 


    이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죄의 정의에 대해 씨름합니다. 그리고선 죄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라 정의하죠. 이 책에서 그는 좋은 정의를 찾아보려 노력합니다. 그는 죄의 전통적인 정의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죠. 


    그 역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적합한 죄의 ‘정의’ 인가 의구심을 품죠. 이유는 바리새인의 존재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최선을 다해서 지켰는데도 실패했잖아요. 왜죠? 



    지난 주에도 나눴지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의 구주를 섬겼어요. 스스로의 구원을 성취하려고 했기 때문이죠. 그들은 하나님을 이상한 포지션에 위치시킵니다. “우리가 선하게 사니까 하나님은 축복해줘야만 한다,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한다, 행복한 삶을 보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천국에 들여보내줘야만 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지킬 때,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의 도덕적 성과 위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들의 자부심, 도덕적인 성과, 그리고 종교성 위에 말입니다. 이는 그들을 내면으로부터 파괴했습니다. 교만과 자기의와 배회와 엄격함이 들어서고, 결국엔 겉까지 파괴되는거죠. 


    죄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저는 그가 옳다고 보는데,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으로든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좋은 것들이어도 궁극적인 가치가 되면 안되는거죠. 



    키에르케고르는 급진적인 성경적 관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로마서 6장, 늦가을에 강해할 내용인데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선한 것들이라도 궁극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만약 어떤 것을 보고서 “내가 저걸 갖기만 하면 가치 있는 인생이 될텐데..” 혹은 “저걸 못 가지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만약 스스로의 돈, 커리어, 재능, 외모, 혹은 관계, 자식, 권력, 인정, 편안함, 지배력,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보다 당신을 더 가치있고 안전하게 만드는 것 같다면, 당신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 할진 몰라도, 기도를 할진 몰라도, 심지어 율법을 지킬진 몰라도, 당신의 신앙과 삶의 정당화, 그리고 정체성의 뿌리는 사실상 다른 신에 대한 숭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마음에 영적인 방화를 방화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불이라는 비유입니다. 그럼 영적인 방화를 일으킨다는게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중독의 파괴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독이란 것이 안과 밖으로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중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첫째로, 붕괴를 일으킵니다. 중독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죠. 왜냐하면 중독된 그 대상을 더더욱 원하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하이 (High) 상태나 만족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것을 더욱 더 원하게 됩니다.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게 되죠. 점점 만족감은 떨어져만 갑니다. 그렇게 점점 붕괴되어가죠.


    한편, 중독은 고립을 불러옵니다. 거짓말이 늘어갑니다. 스스로를 변호해야만 하죠. 다른 모든 것들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 남 탓이 늘어갑니다. 그러면서 말하죠. “아무도 날 이해 못해! 모두가 날 적대시 하잖아.” 현실 부정이 일어나는겁니다.


    붕괴와 고립과 부정이 일어나는겁니다. 점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돼요. 가면 갈수록 현실과의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모두들 잘 알고 계시죠. 아마 여기 있는 분들 모두가 아시는 내용일겁니다. 저 또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혹은 제 3자의 위치를 통해 이러한 중독의 파괴성을 잘 압니다. 잠시만요. 만약 아이언 자이언트가 옳다면요? 



    여러분 모두 10살 이상이셔서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네요. 하지만 모두 한번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제가 본 애니메이션 중 가장 뛰어난 작품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영화죠. 아이언 자이언트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혼은 죽지 않아. 영혼은 죽을 수 없어.”


    만약 그가 옳다면, 성경이 말한대로 여러분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남아 자의식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만약 아이언 자이언트와 키에르케고르가 옳다면, 전 인류는 그들이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이 아닌, 평생 스스로를 충족시켜줄 수 없는 어떤 것에 걸고 있다는거죠. 여러분은 중독되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중독자죠.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C.S 루이스는 이를 종합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기독교가 우리가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만약 우리가 80년 정도만 살고 말 것이라면 별로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나의 나쁜 성향이나 질투는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영원에 비하면 내 삶 전체에서 악화되는 정도는 발톱의 때만도 못할 것이다. 100만년만 지나도 나 자신이 지옥이 될 것이다. 만약 기독교가 사실이라면, 지옥은 이런 상황에 대한 가장 적합한 용어다.”



    지옥은 불평불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항상 불만에 가득차서 남을 비난하고, 자신은 그들과 관련 없는 것처럼 굽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을 비판도 하고, 스스로 중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언젠가는 자기반성이 불가능해지는 날이 옵니다. 이제는 스스로를 비판할 ‘나’가 없습니다. 기분을 느낄 ‘나’도 없죠. 그저 불평을 계속하다 결국 불평기계가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에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자라면서 자기 자신이 ‘지옥’이 됩니다.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말이죠. 


    지옥불.. 불타는 통나무를 보신 적이 있나요? 커리어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듭시다. 만약 여러분이 커리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면, 커리어에 무언가 흠이 생길 때 단순히 상처 받는 정도가 아니라 (상처는 이해할만한 것이죠) 자기 자신이 파괴됩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느끼고, 심해지면 스스로의 몸을 다리 밑으로 던질 수도 있는거에요. 이것이 붕괴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사랑하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그 사람에게서 찾으면, 그와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단순히 상처 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도 이해될만한 것이죠) 자기 자신이 파괴된다는거죠. 스스로를 쓸모 없다고 느끼고, 심해지면 역시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는 경우가 생기는거에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그것들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어요. 결국 여러분을 붕괴시키는거에요. 고립시키는거죠. 따라서 이것들이 잘못되었을 때, 여러분은 단지 두려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비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단지 화나는 정도가 아니라 끔찍하게 경멸적이 되죠. 낙담하는 정도가 아니라 끝도 없이 스스로를 혐오하게 됩니다. 영원히 말입니다. 이것이 지옥불입니다.


    이 모든 것의 종착역이 어딘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경우 부정입니다. C.S 루이스가 지옥을 묘사할 때마다 항상 말하길, “지옥의 문은 안으로부터 잠겨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실체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점점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좋지 않아.”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좋지 않은 상태야. 하지만 다른 곳에 있는 나는 상상할 수 없어. 사람들은 날 이해하지 못할거야. 이게 너희가 말하는 것만큼 나쁜 건 아니라고. 내가 충분히 조절할 수 있거든!” 



    이게 지옥입니다! 지옥이라구요. 지옥의 모습입니다. 만약 제 말이 옳다면,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검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신 나간 이 모습을 보세요.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묘사말이죠. 주석가들은 오래 전부터 이렇게 적어왔습니다. 이 부자가 놀랄만큼 눈이 멀었으며, 부정적이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요. 이를테면, 보세요. 나사로는 분명 천국에 있죠? 부자는 지옥에 있어요. 근데 여전히 나사로에게 명령을 하려해요. 여전히 자신의 목을 나사로가 와서 축여주길 바라죠. 아직도 자신의 종으로 여기는거에요. 



    다른 부분도 볼까요? 그는 지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요. 반대로 나사로를 지옥으로 보내달라하죠. 나가게 해달라는 말 자체를 안한다고요. 그러면서 심각하게 하나님 탓을 합니다. 그분이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나사로를 보내서 제 다섯 형제에게 사후에 대한 정보를 좀 주세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난 충분한 정보를 받은 적이 없어. 아무도 날 이해 못해. 난 여기 있을 자가 아니야. 그나저나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군. 난 저 천국 위로 기어 올라가고 싶진 않아. 저... 저 사기꾼 신이랑 같이 지내라고? 저 작자가 혼자 뭘 하고 있건 상관 없는데, 그냥 아무나 좀 보내서 잠깐 휴식 좀 줄래요?” 



    요약하겠습니다. 지옥은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기초한 정체성이 영원히 지속되는거죠.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이라고요. 다른 정체성의 영원한 지속이죠.


    자아붕괴, 붕괴, 붕괴.. 그러나 그 현실을 부인하는거죠.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지옥의 개념이 자리잡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지옥에 던져버리는 신이고, 구덩이에다 인간을 가둬놓고 그들이 기어오르며 “안돼요! 제발 꺼내줘요!!” 하면 “응 안돼~ 너무 늦었어. 너를 위해 마련된 지옥이란다.” 하는 그런 이미지.


    C.S 루이스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길게 보면 지옥의 교리에 대한 반박들에 대답하는 일 자체가 일종의 의문이 된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해줘야 하는가? 과거의 죄를 다 지워주고 모든 죗 값을 치뤄주어 새 출발을 하게 해주는 것? 갈보리에서 이미 해주셨다. 용서해주는 것? 그들은 용서해달라고 물은 적도 없다. 그냥 하고 싶은대로 냅두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라니까?”



    종국에는 결국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뤄지길 원합니다” 하고 말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이 “기어코 네 뜻을 들어주마” 하시는 자들.


    지옥은 자기 선택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이 없이는 지옥은 성립이 안됩니다. 



    적용점을 좀 말씀드릴게요. 지금까지가 가장 긴 부분이었다고 말씀드렸죠? 저한테 있어서 지옥의 성질을 아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 자신과 그리고 여러분은 일종의 영적인 중독 상태에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죠. 모든 중독은.. 여러분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해요. 이것의 심각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심각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서 평생 하는 일은 바로 이런겁니다. 지옥불이 불타기 시작하는걸 보면 바로 “후!후!후!” 하고 끄는거에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저는 항상 이런 상황과 싸워야만 했어요. 물론 여러분은 복음과 은혜의 도우심으로 싸우게 됩니다. 하지만 지옥불은 계속해서 지펴져요. 그런데 이것이 뭔지 아는 것만으로 엄청나게 도움이 됩니다. 무엇이 이 불을 지폈는가? 무엇이 이 불을 끌 수 있는가? 



    도대체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에 두신 적이 있습니까? 왕의 자녀라는 사실, 이 세상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 올 사명에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보셨습니까?


    여러분은 그 어떤 환경의 변화가 생겨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는 근본적인 정체성을 소유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내가 누군지 안다.” 이런 안정감을 얻어본 적이 있으세요? 여러분은 단지 남자사원인가요? 혹은 여사원인가요? 단지 예술가입니까? 단지 엄마이신가요? 아빠이신가요?


    정말로 이 교리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만큼의 깊이를 알고 싶으십니까? 이처럼, 지옥의 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둘째로, 지옥의 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세상에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옥의 교리는 평안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합니다. 


    예상답변. “뭐라고요?!”  


    여기에 대해선 간결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8월 말에 예배에 오셨다면 이 문제에 대해 설교한 것을 아실거에요. 마가복음 13장을 살펴봤죠.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입니다. 지금은 너무 남은 시간이 짧아 그런 큰 주제를 다루긴 버겁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심판의 하나님과 지옥의 교리를 믿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며, 따라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다. 웬디 카미너 (미국의 변호사이자 작가)는 작년 네이션지에 기사를 하나 썼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쓴 릭 워렌과 인터뷰를 마친 후였죠. 웬디는 릭 워렌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그의 신앙에 대해선 여전히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분열을 초래한다. 마지막 날에 비기독교인은 아무리 착해도 버려진다. 회심하길 거부한 우리들이 저주당할 거라 말하는 사상에 평등한 시민권이란 개념이 끼어들 자리가 어딨는가?”


    “회심하길 거부한 우리들이 저주당할 거라 말하는 사상에 평등한 시민권이란 개념이 끼어들 자리가 어딨는가?”


    그녀가 말하는건 이런겁니다. “너희는 우릴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할 수 없어. 우리가 버려졌고, 심판 받았고,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 말이지. 너희는 우릴 억압하고,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기면서 스스로 옳다는 자아도취에나 빠지겠지.”



    이러한 반박은, 제가 보기에 이해할 만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지옥에 대해 말하는 바를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웬디가 말하는 개념은 그런 폭력적인 신이 우리에게 명령한 내용들이 아니거든요. 안 그런가요? 제가 오히려 흥미를 느끼는 점은, 25절의 내용입니다. 다른 주석가들도 여기서 놀라죠.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지옥을 바라보며 이 바보같은 부자, 현실 감각이 없는 이 사람을 바라보며 뭐라고 말하나요? “이 악마같은 죄인아!” 이러나요?


    뭐라고 말하죠? “얘야(Son)..” 테크논이란 주석가는 말합니다. “이 말엔 연민이 묻어있습니다. 슬픔도 묻어있고, 비극적인 마음도 묻어있죠.” 예수님도, 아브라함도, 하나님도, 성경을 믿는 그 누구도, 지옥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에게.. 사실 누가 그런지는 거의 알기가 불가능하지만요. 자기 자신의 상태만 해도 정말 자주 점검해야 알까말까한데 말이죠. 남들 중 누가 천국과 지옥에 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지만 포인트는, 만약 그걸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업신여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겁니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이런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미로 슬라브 볼프가 ‘배제와 포용’이라는 책에서 쓴 엄청난 챕터를 이해하지 못할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저는 이를 매년마다 인용하는데,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죠.



    미로슬라브 볼프가 쓰기를, 자신은 크로아티아 사람으로서 발칸 반도에서 직접적으로 폭력을 겪었거나 혹은 겪은 지인들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사람들이 보복과 앙갚음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나한테 이런 짓을 했어? 너에게 그대로 돌려줄거야. 나에게 준 고통만큼 되돌려주겠어.” 하지만 그가 말하길, 이런 보복의 사이클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불이 붙은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아서 불이 붙었다는겁니다. 이건 놀라운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불의에 화를 내시지 않는다면, 그런 신은 예배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든 폭력적 의지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판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질 때에만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의 논문 주제는 이것이었다. ‘비폭력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신적인 처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비폭력은 심판을 거절하는 하나님을 믿는 결과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위해서는 한적한 시골집의 평온함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무고한 피가 흥건한 땅에서는 자유로운 사고에 고분고분 따르는 포로들과 함께 어김없이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여기서 볼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집이 불탄데다가 가족이 살해, 강간당하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을 만난다면, 복수의 칼을 뽑아들고 보복의 사이클로 들어가는 그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뭐라고 말할건가요. “폭력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 이런 도덕 기준만으론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정의를 충족시키지도 못합니다. 불합리를 당한 사람은 누구라도 외칠겁니다. “정의는 이루어져야만 해!” 


    볼프는 말합니다. “제가 아는 바로, 정의를 갈망하는 인류의 마음을 충족시키면서도 피의 보복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란 사상 뿐입니다.”



    만약 심판하는 신이란 개념을 믿지 않는 일이 인간을 복수의 사이클로부터 구출해 낼 방법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명백히 틀린겁니다. 만약 모든 것을 막판에 바로 잡을 신이 없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칼을 빼어들고 보복의 늪에 빠져들 것입니다. 이게 볼프의 결론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러분에게 아직 이런 일들이 닥치지 않았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건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죠 (언제 닥칠지 모르니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볼프는 이것이야말로 크로아티아인으로서 이 지구 상에서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라고 고백합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살기 위해 지옥의 교리는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지옥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뭐라고요? 잠시만요. 3개 중에서도 제일 최악이네요. 심판의 하나님이란 개념은 사랑의 하나님과 정반대로 보이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틀렸어요. 충분한 경의를 담아 말씀드립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봅시다. 부자는 그의 다섯 형제들을 위해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기적을 원합니다. 나사로를 다시 보내주세요!” 그들은 나사로가 이미 죽었단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만약 나사로가 갑자기 무덤에서 일어난다면, 부자의 다섯 형제 앞에서 말이죠. 그건 기적입니다. 말도 안되는 엄청난 기적이에요. 누군가 죽었다 살아난거에요.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이런 미친, 나사로잖아?”


    “지옥은 존재한다!”


    뭐라 대답할 것 같나요? 부정할까요?


    당연히 그렇구나 하겠죠.


    “이런 젠장, 좀 더 착하게 살아야겠군. 지옥에 가긴 싫어.”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불가능해. 이런 식으로는 절대 설득할 수 없어.” 


    이 말은 이성적 설득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당연히 어느정도 수준에선 설득이 되겠죠. “젠장, 지옥이 존재하는 줄 몰랐어. 더 착하게 살아야지. 이것 봐. 내 형제한테서 ‘조심해!’ 라고 편지가 왔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는겁니다. “공포, 지옥에 대한 공포는 절대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이런 식으론 안된다는거죠. 



    아이러니하게도, 지옥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지옥에서 꺼내주지 못해요. 지옥의 불을 끄지 못한다고요. 그 불이 뭐였죠? 저와 여러분에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잘못이 뭐에요? 세상의 잘못이 뭐냐고요. ‘자기 중심적 사고’ 잖아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한 죄라고요! 나, 나, 나! 너가 아닌 나. 내가 너보다 나아. 내가 너 위에 있어. 너보단 날 위해 살거야. 이게 우리가 잘못된 점이에요.


    여러분이 남들을 지옥으로 협박할 때, 그들이 설득되어 “지옥가긴 싫으니까 착하게 살아야지.” 라고 말한다 쳐봅시다. 그들이 착해지려는 이유가 뭔가요? 선 그 자체를 위해서인가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인가요?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착해지려는겁니다. 이건 더 심한 이기주의입니다. 도덕적 이기주의도 여전히 이기주의에요. 이 뿐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착한 일을 하나요? 아뇨, 그저 하나님을 이용할 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선하게 살거니까 신은 내 삶에 마땅한 보상을 줘야해. 성공을 줘야지. 가정을, 꿈에 그리던 남자 혹은 여자를, 그리고 천국에도 데려가 줘야하지.” 등등


    이것 보세요. 결국엔 똑같이 다른 요인들에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는거죠. 갑자기 엄청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교회도 나가고, 성경도 읽고 온갖 선한 일을 할 수는 있겠요. 지옥이 무서우니까! 이건 지옥불을 오히려 지피는거에요. 단지 여러분의 이기심과 교만과 악을 새로운 도덕적 삶에 맞춰 재조정하고 있을 뿐인거죠. 스스로를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마음 속 깊은 악을 동기로 이용하고 있는거죠. 진짜 선한게 아니에요.



    우리 마음 속 깊은 구조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급진적인 사랑. 조건 없는 혁명적인 사랑. 불신과 거부와 음해로 가득찬 우리 마음을 받아줄 유일한 사랑.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고, 우리의 삶과 존재를 완전히 뒤바꿀 바로 그 사랑. 어디서 이런 사랑을 얻나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계십니다. “만약 나사로를 죽음에서 되살려주신다면 그건 엄청난 기적일거에요. 그를 보내주세요. 그럼 될겁니다.” 아브라함은 거절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걸 읽고 뭔가 떠오르는 장면이 없습니까? 예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잖아요? 예수의 부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겁니까? 충분하지 않아요. 만약 예수님이 산꼭대기에 갑자기 나타나신 것으로 끝났다면, 사람들에게 공포심은 심어줄 수 있었겠죠. “와나.. 진짜 주님이었네. 이제 어떻게 해야되지? 어떤 결단을 해야하는거야? 뭘 해야 지옥에 안가지?”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냐, 내가 왜 죽은지를 알아야만 해.” 어디서 그 이유를 찾죠? 모세와 선지자들입니다. 너희는 내가 죽었다 살아난 이유를 알아야 해. 모세와 선지자들.. 그곳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사랑이었단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유가 중요합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으스러뜨린 것은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지켜보았고,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형상을 넘어 흉측해지셨고, 인간으로서 최고치로 망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속죄 제물로 만드셨고, 그 제물로 인해 결국 정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알기 전까진 그분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어떤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몇 년 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설교 예문인데 무슨 책인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도움이 되었죠. 그는 여러분의 친구가 갑자기 와서 이렇게 전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말합니다. “헤이, 내가 며칠 전에 너희 집에 있는데 갑자기 청구서가 날아왔어. 근데 너가 집에 없길래 내가 대신 냈어.” 로이드 존스 박사님이 말하는 것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냐는거에요. 정답은, 그 청구서가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를 알기 전까진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겁니다. 그냥 20센트짜리 우편료였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아, 고마워” 하고 말겠죠. 그런데 만약 국세청에서 당신을 마침내 발견하여 10년 치의 밀린 세금을 청구하는 용지였다면요? 만약 상상을 초월하는 빚 청구서였다면요? 


    로이드 존스는 그 친구가 얼마를 내줬는지를 알기 전까진 단지 악수로 고마움을 전할지, 바닥에 엎드려 그의 발에 입을 맞출지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만약 당신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당신을 가치있게 여기시는지 말이죠. 지옥을 믿기 전까진, 당신의 마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죠? 왜 예수께선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다른 인물을 합친 것보다 더 지옥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을까요? 그분이 십자가에서 지옥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옥불이 그분 마음 속을 불태웠어요. 사도신경은 그가 지옥까지 강하하셨다고 말합니다. 지옥에 강하하셨다고? 무슨 뜻이지? 


    그분이 말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친구의 사랑을 잃는 일은 아픕니다. 배우자의 사랑을 잃는건 더 아프죠. 더 깊고 강한 관계였을수록 그 상실감은 더욱 크고 고통스럽습니다. 



    지금부터 드릴 말은 우리의 관찰 범위조차 넘어서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잃으셨을 때,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지속되어 온 사랑을 잃었을 때, 그분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단절과 고립을 경험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옥에서 영원히 겪을 고통조차 이에 비하면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겪어야 할 고립과 단절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왜죠?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의 십자가가 단지 육체적인 고통이나 혹은 감정적인 고통 정도가 아니었음을 알지 못한다면, 만약 지옥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이 어느정도인지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셨는지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절대로! 



    아이러니하게도, 심판이란 개념을 지워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이 넘치는 존재로 만드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난 사랑의 하나님은 믿어요. 근데 지옥이나 심판은 안믿어요.” 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물어요. “그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려고 지불한게 뭔가요?” “몰라요, 지불했든 안했든 그냥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잖아요.” 


    만약 하나님이 그냥 모두를 사랑할 뿐,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았다면,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높여드릴 수도, 그분을 기뻐할 수도 없었을테고, 뭐 물론 제 삶에 영향은 여전히 있었겠지만요. 만약 제가 변화되길 원한다면, 만약 저를 감싸는 사랑을 느끼기 원한다면, 그 사랑을 찬양하고 놀라워하기 원한다면, 대담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원한다면, 변화를 바란다면, 그 사랑이 놀랍고 경이롭다고, 내 영혼과 삶을 드리겠다고 말하길 원한다면, 저는 지옥을 믿어야만 합니다. 



    결론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교리. 만약 여러분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를 왜곡해서 폭력의 구실로 삼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읽고 이해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정의에 대한 개념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집약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 분이 심판을 내리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당하고 자신의 대적들을 위해 지옥에 가기 위해 오셨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믿는다면, 여러분이 이웃과 평화롭게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당신을 위해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스크립트 출처는 On the road to Damascus 블로그입니다.)